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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게임 The Game - Lester Levenson

awarener 2011. 9. 24. 11:03

 

게임 THE GAME

 

 

 

우리 그룹에는 사람들도 많고 서로 섞여있기 때문에 어떻게 시작을 해야 할지 모르겠군요.

다수의 사람들에게 적합한 것을 하는게 가장 좋겠죠.

효과적인 대중적인 가르침이란 없습니다.

가르침이 효과적이려면 개인을 기반으로 한 가르침이어야 하죠.

그룹에 초점을 맞춘 스승의 힘은 개인에게 초점을 맞춘 스승의 힘에 미치지 못합니다.

분산되어지고 집중되어지지 못하죠.

 

 

구루가 제자 개인에게 가르침을 줄 때는 모든 힘이 제자에게 흘러 그가 진리를 볼 수 있는 지점까지 그를 고양시킵니다.

각각의 개인은 그 순간에 찾고 있는 것과 필요로 하는 특정한 것이 있습니다.

제가 어떤 한 사람에게 그가 질문하는 것에 대해 대답을 하면 그 사람과 똑같은 질문을 가지고 있고 대답에서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다른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일반적으로 저는 질문을 받고 대답을 하는걸 좋아합니다.

하지만 여러분들이 원하신다면 우리가 말하려는 주제에 대해서 짧게 개관을 설명하고 싶군요.

 

 

기본적으로 우리들은 모두 무한하고 완벽한 존재들입니다.

저는 우리 모두가 적어도 이론적으로라도 이것을 받아들인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말을 경전에서 특히 힌두 경전에서 들었습니다.

마스터들이 우리에게 이것을 말해주었습니다.

저 또한 똑같은 것을 말했습니다.

 

 

하지만 왜 우리는 우리 자신인 이 무한하고 완벽한 존재를 드러내지 못하는걸까요?

그 이유는 여러 생애 동안 우리가 이 한계의 게임을 해온 습관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게임을 너무나도 오랫동안 해왔고 너무나도 완전하게 우리가 한계라는 게임을 하는 무한한 존재라는 사실을 망각해 버렸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인 이 무한한 존재를 바라보지 않습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매일 매순간마다 우리가 설정한 몸이라 불리는 이 꼭두각시 인형을 보고 있고 우리 자신이 몸이라고 상상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게임을 너무나도 오래동안 해왔기 때문에 우리가 실제로는 무한한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되는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기 위해서는 대단한 의지가 필요합니다.

이 의도의 힘이 우리가 매순간 스스로를 한계지워진 몸이라고 상상하는 것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줍니다.

우리가 이렇게 해서 단 1초라도 우리의 참모습인 무한한 존재를 보게 된다면 우리는 그 1초를 모든 한계를 되돌리는데 사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처음에는 우리가 무한한 참자아라는 사실을 먼저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나면 우리는 한계들을 렛고우하는 작업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실제로는 이 몸이 아니고 이 마음도 아니라는 것을 받아들여야만 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하기 전까지는 우리는 “제한된 몸의 존재라는 게임”이라 불리는 덫에서 벗어날 가능성이 전혀 없습니다.

 

 

그러니 경전들에 나와 있듯이 “고요히 하고는 당신이 그것”이라는 것을 아세요.

우리가 하는 모든 생각은 필연적으로 한계지워진 것들입니다.

생각들을 렛고우 하시고 고요하게 있으세요.

우리가 알고 있듯이 그 방법은 마음을 고요하게 하는 것입니다.

마음을 고요하게 하세요.

마음이 충분히 고요해지는 순간 우리의 참모습인 이 무한한 존재가 분명해집니다.

그러니까 방법은 매우 간단합니다.

당신 자신인 무한한 참자아를 볼 수 있도록 그 마음을 충분히 고요하게 하세요.

 

 

당신이 그것을 보는 순간 즉 당신 자신인 이 무한한 존재를 보는 순간

당신은 즉시 당신이 아닌 남아 있는 생각들을 렛고우하는 작업을 시작하게 될겁니다.

그리고 더 이상 생각이 남아 있지 않을 때 오직 무한한 참자아만이 남아 있게 됩니다.

 

 

아주 기묘한 일이지만 당신이 찾고 있는 것은 당신에게 가장 가까이 있는 것입니다.

당신이 “나 I" 라고 말할 때마다 바로 그것입니다.

당신이 “나 I" 라고 말할 때 당신은 무한한 존재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이 “나 I는 몸이다." 라고 말할 때 당신은 “무한한 존재인 나 I는 이 한계지워진 마음을 가진 한계지워진 몸이다." 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토록 간단한 것입니다.

하지만 간단한 것이라고 해서 그것이 당신이 오랜 세월 동안 붙들고 있었던 습관들을 렛고우하는게 쉽다는건 아닙니다.

 

 

모든 사람들이 찾고 있는 이것은 바로 모든 사람이 행복이라 부르는 그것입니다.

또한 이것은 우리 자신의 본래 모습인 무한한 참자아에 지나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그가 하는 모든 행동마다 자기 자신인 무한한 참자아를 돈. 행복. 성공. 사랑 등등 다른 이름으로 부르면서 찾고 있는겁니다.

이런 이야기를 그동안 계속 들어왔고 또 들어왔는데도 왜 우리는 아직도 우리 자신이 아닌 한계지워진 몸으로 존재하기를 멈추지 않는걸까요?

누가 대답해 주시겠어요?

왜 우리는 한계지워지는 것을 멈추지 않는 것이죠?

 

 

Q: 왜냐하면 우리가 그렇게 할 수가 없으니까요.

 

 

Lester: 지금 무한한 존재가 한계지워지는 것을 멈출 수가 없다고 말씀하시는건가요?

 

 

Q: 우리가 그렇게 하기를 원하지 않아서입니다.

 

 

Lester: 그렇습니다. 우리가 원하지 않아서입니다.

 

 

Q: 무한한 존재인 우리가 원하지 않아서라구요?

 

 

Lester: 네. 무한한 존재인 나 I 가 자신을 제한된 몸이라고 생각하고 그것도 너무나도 오래 그렇게 생각해 와서 무한한 존재인 나 I는 계속해서 나 자신을 이 제한된 몸이라고 상상하는 것을 렛고우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이해가 가나요?

 

 

Q: 네.

 

 

Lester: 당신이 항상 "나 I"를 말할 때마다 더 이상 나아가지 않는다면

당신은 자신인 무한한 존재에 대해서 말하지만 그 즉시 “이 제한된 몸입니다.”를 덧붙이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이 만약 지금 이 순간부터 "나 I - 나 I - 나 I" 만을 말한다면 당신은 완전한 깨달음을 얻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신이 "나 I - 나 I - 나 I" 만을 말할 때 당신은 "나 I"에 대해서만 집중을 하고 "나 I는 온갖 필요를 가진 이 조그만 몸이다." 라고 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깐 자기 자신인 무한한 참자아를 매순간 경험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가 "나 I"를 경험할 때면 우리 모두는 자기 자신인 무한한 존재를 경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들은 그걸 보기를 원하지 않아요.

여러분들을 거기에다 즉시 이 몸이란 것을 덧붙이길 원하죠.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요?

먼저 자신에게 이렇게 말하세요. “나는 이 몸이 아니고 이 마음이 아니다. 그렇다면 나는 누구인가?”

만약 우리가 이 몸과 마음을 충분히 거절한다면 우리는 자기 자신을 스스로 명백하게 자각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결코 무한한 존재가 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미 그것이니까요.

우리는 단지 우리가 아닌 개념들을 렛고우할 수 있을뿐입니다.

우리는 단지 우리가 이 몸과 마음이라고 하는 개념을 렛고우할 수 있을뿐입니다.

첫째로 해야 할 것은 우리가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이 한계지워진 존재의 개념들을 렛고우하고자 하는 열망을 가지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의 진정한 모습인 무한한 참자아가 되고자 하는 강한 열망만이 우리가 거기에 빨리 이를 수 있게 하는 유일한 것입니다.

 

 

하지만 앞서 말한 것처럼 우리는 그렇게 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만약 우리가 진정으로 원했다면 우리는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물론 어려움이 있죠. 그 어려움이란게 뭡니까?

그것은 습관입니다. 무의식적인 습관적인 생각이죠. 마음이라는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무의식적으로 생각하는 마음을 공략하는 것입니다.

마음이란 것이 우리의 무한한 존재를 덮고 있는 유일한 커버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참모습을 볼 수 있을만큼 충분히 생각을 멈출 수만 있으면 되고

그 충분한 시간이란 단지 1초면 충분합니다.

만약 당신이 생각을 1초만 멈출 수 있다면 (무의식적인 생각까지 포함해서)

당신은 자기 자신의 참모습을 보는 엄청난 해방감에 충격을 받을 것이고

당신은 자신의 것인 이 무한한 힘을 마음을 말려 없애버리는데 쓸 수 있습니다.

마음은 우리가 가끔씩 한계 없는 무심의 상태에 잠깐이라도 들어갈 때마다 매번 아주 많이 말라버립니다.

 

 

제 생각에는 다음으로 할 질문이 그러면 어떻게 하면 우리가 이러한 열망을 불러올 수 있을까? 이겠죠.

만약 그 열만이 충분히 강하다면 어떤 사람이라도 몇 주 몇 달 혹은 몇 년 안에 무한한 존재를 완전히 보고 깨달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 중 누구라도 이 무한한 존재를 보기를 강렬하게 열망한다면 그리고 그 열망만을 간직한다면

몇 개월 내에 여러분은 자신의 참모습인 무한한 존재를 보고 거기에 안주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스스로를 한계지워진 몸이라고 상상하는 것을 그만두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까 열망이 열쇠입니다.

당신이 아름다운 몸 건강한 몸이 되고자 원할 때 이러한 생각들이 당신이 무한한 존재를 보는 것을 가로막습니다.

여러분은 단지 모든 욕망들을 자신의 무한한 참자아를 발견하겠다고 하는 하나의 열망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이제 제가 말한 것이 여러분들의 소망에 얼마나 가까워졌는지 질문을 받아볼까요?

 

 

Q: 제가 “나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을 하고 있을 때 문득 별을 보다가 제가 별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다른 사람들에게 그 말을 했더니 그들이 “아니. 당신은 그렇게 할 수가 없어.” 라고 말하더군요.

그리고는 저는 “나는 어떻게 할 수 있는지 방법을 찾아야겠어.” 라고 생각했어요.

 

Lester: 지금 당신이 말씀하신 방법은 자아 탐구라는 것이고 가장 뛰어난 방법입니다.

우리가 대답해야 할 마지막 질문은 “나는 누구인가?” 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왜 처음부터 그 질문으로 시작하지 않죠?

당신이 “나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을 할 때 마음이 주는 어떠한 대답도 옳은 것이 될 수가 없는데 왜냐하면 마음이 당신의 참자아를 가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음이란 것은 당신을 한계지우는 것입니다.

그 방법은 오직 “나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만을 붙들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다른 생각이 들어오면 멈추고서는 스스로에게 말하세요.

“누구에게 이 생각이 일어난 것일까? 나에게 일어난 것이군. 그렇다면 나는 누구지?”

그리하면 당신은 즉시 트랙으로 되돌아 오게 됩니다.

 

 

Q: 알겠습니다.

 

 

Lester: 현재 이 방법을 성공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은 극히 드뭅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가 이런식으로 이 방법을 사용하기를 원합니다.

항상 “나는 무엇인가? What am I?” 라는 질문에 대답을 찾으세요.

당신이 하루 종일 무엇을 하든지 명상을 하든 책을 읽든 혹은 무엇을 하든 마음의 배경에 항상 이 질문을 두세요.

“나는 무엇인가? What am I?”

“나는 무엇인가? What am I?”

 

 

저는 “나는 누구인가? Who am I?” 보다는 “나는 무엇인가? What am I?” 라는 질문을 더 좋아합니다.

왜냐하면 “누구 who” 라고 말을 하면 “무엇 what” 이라고 말하는 것보다 몸에 더 가까운 느낌을 주기 때문이죠.

“무엇 what”이 훨씬 더 비인격적인 느낌을 줍니다.

어쨌든 이 질문을 항상 붙들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어떤 길을 따르고 어떠한 방법을 사용하더라도 우리는 항상 배경에 “나는 무엇인가? What am I?” 라는 질문을 붙들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렇게 한다면 마침내 우리는 온전한 대답을 보게 될 것입니다.

 

 

Q: 그 질문과 관련해서 우리는 몇 번이나 그 질문을 해야 하는거죠?

 

 

Lester: 생각이 즉 다른 생각이 들어올 때마다 매번 우리는

“누구에게 이 생각이 들어왔는가? 나에게.. 그렇다면 나는 무엇인가? What am I?” 라고 물어야 합니다.

이 질문은 다른 생각이 일어날 때마다 반복해야 합니다.

 

 

Q: 하지만 만약 어떠한 생각도 들어오지 않는다면 이 질문을 하지 않는거군요?

 

 

Lester: 그렇습니다.

 

 

Q: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거군요.

 

 

Lester: 기다리면서 보는겁니다.

대답을 기다리는게 아닙니다. 대답이란 마음에서 오는 것이니까요.

 

 

Q: 지켜보고 있는거라구요?

 

 

Lester: 네. 지켜보고 있는겁니다.

참자아가 스스로 명백하게 드러납니다.

갑자기 그것이 거기에 있고 당신은 그것이 항상 거기에 있었다는 것을 그리고 당신은 스스로를 몸과 마음이라고 생각함으로써 그것에서 벗어나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는 당신은 자신을 모든 존재로 보게 됩니다.

당신은 모든 사람들 모든 동물 모든 곤충 이 우주의 모든 원자가 됩니다.

 

 

이 우주의 모든 존재는 단지 당신 자신의 존재일뿐이라고 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거기에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 거기에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들은 항상 다른 곳을 보고 있어요.

마음이 충분히 고요해지면 그건 거기에 있습니다.

 

 

그것이 나 있음 I AM의 “나 I"입니다. 그것뿐입니다.

당신에게 그것보다 더 가까운 것은 없습니다.

항상 당신은 몸을 통해서 바깥에서 그것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깥에 있는게 아닙니다.

그것은 여기에 있는 “나 I" 무한한 존재입니다. 

 

 

오직 그 질문만을 붙들고 있는 것은 쉽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질문을 일반적으로 사용하라고 권하는 것입니다.

당신이 어떠한 방법을 사용하든 자신이 무엇인지를 항상 알고자 하는 습관을 기르세요.

그리고 마음에 고요함이 찾아올 때 즉 “나는 무엇인가? What am I?” 이외에 다른 생각이 들어오지 않는만큼 당신의 참자아는 분명해집니다.

 

 

당신이 어디에 있건 당신이 있는 곳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바로 그 “나 I” 가 있는 곳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다시 한번 말하자면 그 질문을 당신이 어떤 방편을 쓰고 있더라고 붙들고 있으세요.

그 대답이 스스로 드러나고 명확해질 때까지 말입니다.

 

 

Q: 무척 어려워 보입니다만

 

 

Lester: 매순간 자신을 한계지워진 몸이라고 생각하는 습관을 렛고우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우리는 항상 우리 자신을 “나는 몸이야. 나는 몸이야. 나는 몸이야.” 라는 생각으로 폭격을 해대고 있습니다.

이것이 늘상 계속 되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자신의 무한한 존재를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나는 속박되어 있는 몸이다 라는 것이 끊임없이 퍼부어지고 있습니다.

 

 

명상이란 다른 생각들이 없어지도록 한가지 생각을 붙들어서 마음을 고요하게 하는 노력입니다.

그 한 생각만을 붙듬으로써 - 만약 우리가 그 한 생각만이 있는 곳에 도달할 수 있다면 -

우리의 무한한 참자아를 보는 것은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모든 명상법은 자신의 무한한 참자아를 명확하게 보기 위해서 마음을 고요하게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Q: 선생님께서 “스스로 명백해진다.” 라고 할 때 참자아는 어떻게 느껴지는건가요?

 

 

Lester: 여러분들이 길의 마지막에 도달하게 될 때 비베카난다가 말했던 것처럼

오직 “나 I" 홀로만이 존재했었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만약 오직 “나 I" 만이 홀로 존재했었다면 ”나는 모든 것이고 모든 사람이다.“ 라는 것이 당신의 느낌이 될겁니다.

당신은 모든 다른 몸들을 당신의 몸과 똑같이 볼 것입니다.

당신은 모든 사람을 자신으로 봅니다.

당신이 당신의 몸을 자기 자신으로 보듯이 당신은 모든 사람들을 당신으로 봅니다.

 

 

그 느낌은 말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너무나도 강렬한 경험이어서 어떠한 한계도 허용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당신이 경험하지 않는 한 절대로 알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현재 우리가 있는 레벨에서 보자면 그것은 우리가 행복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그것은 한계 없는 무한한 기쁨입니다.

처음에 그것은 고양되는 느낌으로 옵니다. 압도적이죠.

담아두기가 힘듭니다. 불편해지기까지 할 정도로 말입니다.

당신은 아무 이유 없이 즐거워지고 술에 취한 것 같아요.

엑스터시를 느끼고 점점 짜증이 나기 시작할 정도로 행복해져요.

 

 

그러다가 당신은 그것에 점점 몰입하다가 마침내 그것이 떨어져 나갈 것이고

남게 되는 것은 매우 깊고 심오하고 달콤한 평화입니다.

그것은 당신이 전에 느꼈던 극렬한 기쁨보다 훨씬 더 좋은 평화입니다.

그래서 당신은 더 이상 기쁨을 원하지 않게 되죠.

환희심은 궁극의 상태는 아닙니다.

궁극의 경지는 절대적인 평화입니다.

우리 모두는 가끔은 그 맛을 보곤 하죠.

 

 

Q: 그러면 우리가 가끔 그것을 우연히 맛보고 다시 잃어버리는 것이군요?

 

 

Lester: 아~ 네. 그래요.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하죠.

우리가 처음으로 그것에 발을 들일 때 우리는 그 상태를 유지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생각의 습관이 다시 우리를 덮치기 때문이죠.

그리고 우리가 생각을 하기 시작하자마자 우리는 우리가 한계지워진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생각은 한계지워진 것이기 때문이죠.

 

 

한계지워진 이 게임을 렛고우하고 세상을 렛고우하세요.

그것을 컨트롤하려고 들지 마세요. 즐기려 들지도 마시구요.

당신의 모든 기쁨을 내면에서부터 가져오세요.

그리하면 이전에는 게임이었던 것이 모두 똑같은 그림으로 됩니다.

모든 것이 다 똑같아져요.

만약 모든 것이 똑같은 것이라면 그것은 절대적인 진리 안에 있는 것이고 그렇다면 어디에 게임이 있을 수 있겠어요?

 

 

당신이 게임에 사로잡혀 있다면 당신은 영원한 환상에 사로잡혀 있는 것입니다.

그 게임은 결코 끝이 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게임 안에 있다면 당신은 자신의 무한한 존재로부터 벗어나 있는 것입니다.

이 게임에는 당신이 완전히 만족하지 못하게 하는 특정한 한계들이 항상 셋팅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몸이라고 하는 게임보다 한 단계 위의 게임이 있고 그것은 모든 것들이 완전히 똑같아지는 단계입니다.

그리고 그 동일함이 바로 당신의 존재입니다.

오직 무한한 하나임만이 남게 되고 그 무한한 하나임이 바로 당신이고 당신의 존재입니다.

그것은 모든 존재들의 존재입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아무런 분리가 없습니다. 모든 존재인 존재만이 있습니다.

 

 

이 존재가 무엇인가를 진정으로 알기 위해서는 당연히 그것을 경험해봐야 합니다.

저는 가장 높은 경지에 대한 최고의 설명은 모든 존재인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Q: 어떻게 하면 제가 그것에 대한 열망을 키울 수가 있을까요?

 

 

Lester: 오직 당신만이 그것을 할 수 있고 아무도 대신해 줄 수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독특한 것입니다. 당신이 해야만 합니다.

우리가 들어봤던 은총이란 것이 항상 존재합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원래의 상태로 돌아갈 때까지 우리를 불편하게 만드는 내적인 존재입니다.

행복을 열망하는 것은 축복입니다. 그것은 항상 거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단지 그것을 깨닫고 가지기만 하면 되는겁니다.

 

 

Q: 어떻게 신이 인간이 될 수가 있는거죠?

그리고 다시 신으로 되돌아간다는 것은 신성모독이 아닌가요?

 

 

Lester: 아닙니다. 누군가가 당신에게 그렇게 말했다면 그 사람은 당신이 최고의 경지를 얻기를 바라지 않는 것입니다.

모든 일은 밤에 잠드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당신은 조그만 갓난 아기로 태어나는 꿈을 꿉니다.

그러다가 1주일이 되고 1살이 되고 20살이 되고 40살이 됩니다.

그리고 당신이 끝도 없이 문제거리에 문제거리를 가지는 꿈을 꿉니다.

이게 단지 밤에 꾸는 꿈이란 것을 기억하세요.

 

 

이러한 일이 계속되고 또 계속되어서 당신은 지치게 되고 마침내 몸이 죽는 꿈을 꾸게 됩니다.

그리고는 잠에서 깨어나죠.

그 꿈을 꾸는 동안 당신이 조금이라도 변한게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당신은 결코 그런 일이 없었다고 말할겁니다.

그저 마음 속에서 일어난 꾸며낸 이야기일 뿐이라고 말할겁니다. 그렇죠?

 

 

이게 바로 우리가 아침에 깨어났을 때 하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낮에 활동하는 이 깨어있는 상태가 바로 잠들어 있는 상태입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인 무한한 존재에 대해서 완전히 잠들어 있는 상태입니다.

우리는 한밤중에 잠에서 깨어있지 못한 것처럼 이 진리에 대해서 지금 이 순간 깨어있지 못합니다.

우리는 단지 깨어있다는 꿈을 꾸고 있는 것이죠.

실제로는 이 상태가 우리가 깨어나야 하는 상태인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렇게 했을 때 우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오~ 이런.. 그런 일은 일어난 적이 없었어.

나는 한번도 이 제한된 몸이었던 적이 없어. 나는 항상 나 자신인 무한한 존재였어."

 

 

그러니까 우리는 정신적으로 세상에서 깨어있다 라고 하는 꿈을 창조해낸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정말 꿈같은 환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꿈이라는 것을 깨닫기 위해서 당신은 이 상태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이해가 됩니까?

그러니까 당신이 질문한 “우리가 어떻게 이런 것을 한 것인가요?” 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우리가 꿈꾸고 있다는 겁니다!

 

 

Q: 의도적으로 말입니까? Deliberately?

 

 

Lester: 네. 의도적으로요.

당신이 알다시피 우리는 무한한 존재에서부터 출발했어요. 수동적인 의미에서 말이죠.

우리는 가장 밑바닥까지 내려왔습니다. - 그게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입니다.

그리고는 다시 가장 위로 올라가서는 우리의 무한함을 다시 보게 되죠.

하지만 이 모든 과정을 거친후에는 우리 자신의 무한함에 대해서 능동적인 앎을 가지게 됩니다.

반면에 이전의 앎은 수동적인 앎이었죠.

 

 

이건 마치 이런 것과도 같아요.

“완벽한 건강”이란 날 때부터 완벽하게 건강하게 태어나서 평생 그렇게 지낸 사람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어요.

그는 적극적인 의미에서 그게 어떤 것인지를 모릅니다.

물론 그가 건강한 상태에 있다는 것은 좋은 것이죠.

하지만 그는 수동적인 의미에서 건강한 것입니다.

그는 온전하게 그것을 음미할 수가 없어요.

그러나 만약 그가 매우 아프게 되어서 수년 동안 거의 죽을뻔 하다가 완전하게 건강한 상태를 다시 얻게 된다면

그가 아프기 전보다 완벽한 건강의 상태가 훨씬 더 의미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런 멍청한 삽질 the silly thing 을 스스로에게 하고 있는겁니다.

우리는 우리의 원래 상태인 무한함에서 아래로 아래로 내려왔다가는

우리 자신인 무한함에 대한 능동적인 앎을 가지고 다시 무한함으로 되돌아 올라가는 것이죠.

하지만 우리가 아래로 내려오는 동안 우리는 우리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를 망각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내면을 살펴본다면 이것을 알 수 있을겁니다.

 

 

Q: 이건 정말이지 제가 평생 처음 들어본 앞뒤가 맞아떨어지는 설명이군요.

왜 우리가 이렇게 아래로 내려왔는지에 대해서는 처음 들어봤습니다.

 

 

Lester: 오케이. 그럼 이제 다시 올라가기로 해요.

 

 

Q: 이런 과정을 하고 있는 사람은 단 한사람인가요?

 

 

Lester: 이 모든 것을 하고 있는 것은 단 하나의 존재입니다.

제 생각에는 가장 좋은 예가 바다와 물방울의 비유인 것 같군요.

존재의 바다인 우리는 우리의 일부분에 조그만 써클을 상상으로 만들고서는 물방울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이 물방울은 스스로 말하기를 “나는 저 물방울과는 분리되어 있고 다른 모든 물방울과도 분리되어 있어.” 라고 하는거죠.

이것은 바다의 한 부분이 상상으로 써클을 만들고서는 스스로를 물방울이라고 부르는겁니다.

그러나 실제로 모든 물방울은 바다인 것이죠.

그것은 바다가 가지고 있는 모든 특성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짜고 물기가 있죠. 구조는 H2O이고 등등..

 

 

제 생각에는 이 비유가 적절한 것 같아요.

혹은 빗 하나가 있는데 그 빗의 이 하나하나가 “난 너와는 분리되어 있어.” 라고 말하는 것과 같아요.

그냥 하나의 빗일뿐인데 말입니다.

우리는 그저 하나의 빗인데 서로 서로 분리되어 다르다고 말하는 이와도 같습니다.

기억하세요.

당신은 오직 하나뿐인 무한한 존재의 바다입니다.

그것은 바로 당신의 “나 I”입니다.

그것을 찾고 깨달으시고 영원히 거기에 안주하세요!

 

 

 

- This Session was recorded in Los Angeles, May 20, 1968.

 

 

from Keys To The Ultimate Freedom

 

 

출처 : 한국트랜서핑센터
글쓴이 : 아인소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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