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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깨달음 Realization - Lester Levenson

awarener 2011. 9. 24. 09:59

 

 

우리는 책을 읽음으로써 지식을 얻습니다.

우리 대부분은 이미 지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지만 아직 깨달음이 없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그것을 경험하고 느끼고 깨닫고 우리의 존재로 그것을 통합하는 그런 앎입니다.

우리가 성장하는데 필요한 유일한 앎은 우리가 우리의 내면의 눈과 느낌으로 깨닫는 앎입니다.

 

 

우리가 곰곰이 살펴본다면 앎이란 것은 우리의 느낌과 들어맞아야만 합니다. 즉 올바른 느낌이죠.

그리고 이것들은 우리의 존재와 통합되어야 합니다.

그리하면 그것은 깨달음, 드러남이 됩니다.

그리하면 우리는 알게 될 것이고 또한 우리가 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깨달음이란 그것을 처음으로 진정하게 보게 되는 것입니다. 비록 당신이 수없이 그것을 들었겠지만요.

당신이 깨닫는다면 당신은 마치 그것을 처음으로 들어본 느낌일 것입니다.

그것은 마음속에 환하게 불이 밝혀지는 것과 같고 당신은 “오.. 이제 볼 수가 있어. Oh, now I see.” 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당신이 그것을 이전에 수백번도 더 들었지만 이번에는 그것을 보고 경험하는 것이죠.

이것이 깨달음입니다. 당신에게 생생한 실재가 된 것이죠.

 

 

이렇게 경험되고 알려진 앎이야말로 우리에게 쓸모가 있는 유일한 앎입니다.

우리는 그 주제에 관한 모든 것들을 읽을 수도 있지만 우리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고 변화를 가져올 수도 없어요.

이것은 우리가 깨달음을 통해서 우리의 지식을 우리의 존재와 통합시키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깨달음의 앎은 비지성적인 non-intellectual 것입니다. 비록 우리는 지성을 수단으로 사용하지만요.

우리는 마음을 사용하고 우리의 마음을 대답을 향하도록 합니다.

그러나 결국 당신은 그 대답이 마음으로부터 나오진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될 겁니다.

 

 

그것은 바로 마음의 뒤편에서 옵니다.

그것은 앎의 영역에서 옵니다. 전지한 영역말이죠.

우리의 생각을 고요하게 하여 마음을 침묵하게 함으로써 우리 각자는 그 앎의 영역에 접근할 수가 있습니다.

그리하면 당신은 깨닫게 될 것이고 그것을 실재로 만들게 될겁니다.

당신은 알고 당신이 안다는 것을 압니다.

제가 방금 말한 것에 대해 질문이 있나요?

 

 

Q: 앎과 느낌은 같은 것인가요? Is knowingness and feelingness the same thing?

 

 

Lester: 아니오. 느낌이 앎보다 먼저 옵니다.

 

 

Q: 앎이 느낌을 넘어서는 것인가요? 앎이란 옳다고 느껴지는 그것인가요?

 

 

Lester: 두가지 다 예스입니다. 당신이 경험해 보아야 합니다.

사물에 대한 느낌이란 것도 있지만 당신이 당신이 안다는 것을 그냥 알 때는 느낌이란게 없습니다.

앎이 더 높은 차원의 것이죠.

우리는 생각함의 영역인 추론 사유에서 출발합니다.

그 다음으로는 느낌의 영역으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가장 높은 영역은 앎의 영역입니다.

 

 

Q: 에고에도 느낌이라는게 있나요? Is ego implied in feeling?

 

 

Lester: 네. 느낌은 에고의 높은 상태이죠. 그러므로 거기에는 이원성이 있습니다.

“내 I”가 느낍니다. “감정 emotion”을..

하지만 앎은 자각입니다. Knowingness is awareness.

제가 “당신은 알고 당신이 안다는 것을 압니다. You know and you know that you know,” 라고 말할 때는 당신은 자각하고 당신이 자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한다는 뜻입니다.

그것을 한정하는 것은 없습니다. There's no thing conditioning it.

가장 높은 상태는 자각 그 자체이고 존재 그 자체입니다.

The very top state is the state of All Awareness, of All Beingness.

 

 

우리가 거기에 도달해 보면 존재와 자각은 같은 것입니다.

이전에는 그것들이 다른 것인 것처럼 보였지만 우리가 가장 높은 상태에 도달하면

존재 자각 의식은 모두 같은 것입니다. Beingness, Awareness, Consciousness are all the same thing

왜냐하면 당신이 자각하는 자각이란 존재 자체의 존재를 자각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because the Awareness you are aware of is of Beingness being All Beingness.

우리는 우리 자신이 단지 이 몸일뿐 아니라 우리가 다른 모든 몸이고 모든 것들이고 우주의 모든 원자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니 만약 우리가 모든 존재이고 원자라면 우리는 존재 그 자체입니다.

 

 

Q: 지금 내가 그것이다.. 라는 의미이십니까? You mean I am That?

 

 

Lester: 네. 바로 그겁니다. 바로 “나 I"이죠. 가장 높은 상태는 “나 I”입니다. “있음 am”조차 아닙니다.

바로 그 아래가 “내가 있음 I am”이고 그보다 아래가 “나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 I am that I am”이고

그보다 더 아래가 “나는 한계 없음 I am unlimited”이고 그 아래가 “나는 위대하다. I am great”입니다.

 

 

Q: 혹은 신과 하나됨인가요?

 

 

Lester: 글쎄요? “신과의 하나됨”이라. 신과의 하나됨은 아직 최고의 경지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여전히 이원성이니까요.

만약 내가 신과 하나 된다면 거기에는 “나”라는 것과 “신”이라는 것이 있어야 하죠.

궁극에서는 우리는 “나 I"가 곧 신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I” is God

오직 단일한 하나임 a singular Oneness 만이 우주에는 있고 우리 모두는 필연적으로 그 하나임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마지막에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혹은 시작에서 발견하게 되거나요. 당신이 어떻게 보든간에요.

우리는 이러한 한계의 관념을 뒤집어쓴 한계 없는 존재입니다.

그 관념의 첫 번째가 바로 “나는 전체로부터 분리된 개인이다. I am an individual separate from the All.”입니다.

이것이 첫 번째이자 가장 큰 실수입니다.

“나는 분리되었어. 나는 이 인격체야. 내 이름은 레스터고 나는 이 몸을 가지고 있어.”

 

우리가 몸과 마음을 상상하자 우리는 이 모든 문제거리들을 상상하게 되었지만 그것들은 단지 가정에 불과합니다. nothing but assumptions.

그것들은 우리가 내면으로 들어가서 마음을 고요히 하고 진실을 알게 되면 단지 픽션에 불과한 것들입니다.

지금 겉으로 보이는 모든 세상은 결코 존재한 적이 없는 꿈과 같은 환상에 불과합니다.

진실은 바로 외부 세상의 뒤편에 있습니다.

그러니 왜 소란을 피워야 하나요?

 

성장은 단순히 모든 한계의 관념들을 내려 놓으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인 무한하며 완벽한 존재는 항상 무한하며 완벽하고 그러므로 지금 이 순간 이대로 완벽합니다.

우리가 결코 바꿀 수 없는 그것은 바로 우리가 무한한 참자아 unlimited Self 라는 사실입니다.

이 사실은 항상하며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무한한 존재인 나는 내가 제한되고 몸과 마음을 가지고 문제거리들을 가지고 있다는 상상을 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상상일뿐이죠.

 

 

Q: 당신이 말씀하신 그 완전한 자각의 상태에 곧바로 이르기 위해서 필요한 테크닉은 무엇인가요?

 

 

Lester: “나는 누구이고 무엇인가? Who and what am I?” 라는 질문을 가지고서는 그 대답이 스스로를 드러낼 때까지 기다려 보십시오.

생각은 결코 답을 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생각이란 온통 한계지워진 것이니까요.

그러니 고요함과 명상 속에서 이 질문들과 함께 있어보세요.

“나는 누구인가? Who am I?”

“나는 무엇인가? What am I?”

 

다른 생각들이 떠오르거든 그것들을 다시 돌려 보내십시오.

그게 잘되지 않는다면 “누구에게 이 생각들이 일어나는거지? 나에게 일어나는거야. 그렇다면 그 나는 누구지?” 라고 물어보십시오.

그리하면 당신은 즉시 “나는 누구인가?” 라는 트랙으로 돌아오게 될겁니다.

이 “나는 누구이며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대답이 올 때까지 아무리 오래 걸리더라도 계속하세요.

 

대답은 바로 한계 없는 참자아입니다. 그것이 명백해지는 것은 마음이 거의 완벽하게 고요해질 때입니다.

지금 이 순간의 즉각적인 깨달음을 방해하는 유일한 장애물은 바로 생각들입니다.

그리고 모든 생각들이란 한계지워진 것들입니다.

그 생각들을 내려 놓으세요.

그리하면 당신은 당신 자신이 항상 그것이었고 지금 그러하며 앞으로 항상 그러할 이 무한한 존재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어려움은 우리가 무의식이라 부르는 과거의 습관적인 생각들의 패턴입니다.

무의식적인 생각들이란 단순히 우리가 이제는 쳐다보지 않는 생각들이고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무의식적이라 부릅니다.

바로 우리가 이것들을 만들었습니다. 이 무의식적인 생각들을 줄이기 위해서는 우리는 먼저 그것들을 의식적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가 그것들을 의식적으로 만들었을 때 우리는 그것들을 놓아 보낼 수 있고 그것들은 영원히 사라져 버릴겁니다.

이러한 과정이 무의식적인 마음을 고요하게 만듭니다.

우리가 더 많이 생각들을 놓아줌에 따라 우리의 참자아가 더욱 명료해집니다.

우리의 참자아가 더욱 명료해짐에 따라 우리는 남아 있는 생각들을 더욱 시들게 할 수가 있고 마침내는 마음이 완전히 고요해질 것입니다.

 

 

Q: 우리는 무의식적인 생각들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먼저 의식적인 생각들을 고요하게 해야 하는거군요?

 

 

Lester: 의식적인 생각이란 단지 의식적으로 된 무의식적인 생각일뿐입니다.

The conscious thought is only the unconscious thought made conscious.

 

 

Q: 그것들은 꿈을 통해서도 나옵니다. 그 상태에서는 그것들이 무의식적인 생각들이 아닌가요?

 

 

Lester: 네. 하지만 깨어있는 상태에서만 우리는 그것들을 놓아줄 수 있어요.

 

 

Q: 우리는 의식적인 생각들을 명상이나 다른 테크닉을 이용해 고요하게 할 수 있어요.

지금 말씀하신 “나는 누구인가?” 라는 것은 두가지 다 해당되는 것이죠? 그런가요?

 

 

Lester: 네. 당신은 “나는 누구인가?”를 생각을 고요하게 하거나 생각을 놓아주는데 모두 사용할 수 있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을 하시고 생각이 떠오르면 “이 생각이 누구에게 떠오르는가?” 하고 물어보세요.

그 대답은 “나에게 떠오르는 것이지.” 가 될 것이고 “그러면 나는 누구이지?” 라고 물어보시면 당신은 원래의 트랙으로 다시 돌아간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신은 생각이 의식 위로 솟아오를 때 그것들을 놓아준 셈이죠.

 

 

Q: 무의식적인 생각이 튀어오르지 못하게 막는 것이 무엇인가요?

 

 

Lester: 무의식적인 생각들은 알아서 튀어오를 것이고 그렇게 되어야만 합니다.

그들이 튀어오르면 의식적인 생각이 되는 것이죠.

그리하면 당신은 그것들을 내려놓을 수 있게 되고 결국은 그것들 모두를 내려놓을 수가 있게 됩니다.

 

 

Q: 우리에겐 몇가지 종류의 마음이 있나요?

 

 

Lester: 오직 하나의 마음만이 있을뿐입니다. There’s only one mind.

지금 이 순간 현재에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이 소위 말하는 의식적인 마음이죠.

우리가 지금 이 순간 보지 않고 있는 부분이 소위 말하는 무의식적인 마음입니다.

우리가 서로 다른 이름으로 부르는 것은 단지 하나의 마음의 두가지 모드일뿐입니다.

It's the mode of mind that we give a different name to.

 

우리가 지금 이 순간 이야기 나누고 있고 자각하고 있는 이것이 소위 말하는 의식적인 마음 의식적인 생각입니다.

무의식적인 마음이란 우리가 지금 이 순간 관심을 두지 않는 모든 생각들입니다.

우리가 초의식 superconscious 이라 부르는 생각들이 있긴 한데 초의식적인 생각 같은 것은 없습니다.

의식을 넘어서는 초의식이란 이미 생각의 영역을 벗어난 것이고 그것은 전지의 영역이며 앎 knowingness 의 영역입니다.

초의식의 영역은 자각 그 자체이며 앎 그 자체입니다.

당신이 무언가를 진정 알게 된다면 생각이란 없습니다. There is no thinking when you know.

 

 

Q: 무의식은 잠재의식과는 다른 것인가요?

 

 

Lester: 무의식과 잠재의식은 같은 것입니다. Subconscious and unconscious are the same.

 

 

Q: 선생님께서는 칼융의 집단의식 이론에 동의하시는지요?

 

 

Lester: 저는 오직 진리에만 동의할뿐입니다. I only agree with Truth.

제가 강조하고 싶은 한가지는 진리는 오로지 그것이 진리이기 때문에 진리인 것입니다.

당신이 그것을 증명할 때까지는 어떠한 것도 받아들이지 마십시오.

심지어는 제가 말하는 것도 받아들이지 마세요. 제가 아는 것처럼 어떻게 이야기하더라도요.

만약 그것인 지금 현재의 당신의 앎과 들어맞지 않는다면 당신은 그것을 받아들이면서도 검증을 해보아야 합니다.

오직 당신 스스로 증명한 것만을 당신은 받아들여야 합니다.

 

 

당신 자신의 힘으로 스스로 모든 지식들을 증명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IT IS ABSOLUTELY NECESSARY TO PROVE ALL THIS KNOWLEDGE FOR YOURSELF.

 

 

그렇지 않다면 그저 남의 말을 전해들은 것에 불과합니다.

당신은 이 지식을 당신의 지식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한가지 유일한 진실 절대적인 진실이 있습니다.

그것에 이름을 붙인다고 해서 그것이 무슨 의미를 가지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무엇 무엇이라 불리우든 아니면 제가 뭐라 하든간에 그것이 의미를 가지는 것은 아니죠.

그게 진실입니까?

그것이 당신의 이해로 통합되었나요?

오직 그것만이 중요한 것입니다.

당신과 나의 차이점이 이것입니다.

당신은 이 지식을 이용해서 완전한 이해를 향해서 가능한한 빨리 나아갈 수가 있습니다.

 

 

Q: 우리가 단계를 거쳐 가는 것이 필수적인가요?

 

 

Lester: 아니오. 무한한 힘과 무한한 앎이 그것이 무한하다는 것을 아는데 무슨 시간이 걸리겠습니까?

No. How long should it take Infinite Power, Infinite Knowledge to know that It is infinite?

 

 

Q: 시간이 걸리지 않겠군요. Wouldn't take any time.

 

 

Lester: 바로 그겁니다. 누군가가 온전히 강렬하게 의도한다면 그것은 즉각 실현될 것입니다.

당신이 다른 무엇보다도 이것을 원하게 된다면 당신은 몇 주 혹은 몇 개월 안에 이것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Q: 우리가 그것을 더욱 더 원하고 원하게 되는 방법이 있을까요?

 

 

Lester: 있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멋진 것인지를 경험하시면 더욱 원하게 되실겁니다.

 

 

Q: 그렇지 않다면 더욱 더 고통스러워지겠군요?

 

 

Lester: 글쎄요. 이 길을 찾아나서게 되는 것에는 두가지의 동기가 있습니다.

고통은 그 중 하나지만 최상은 아닙니다.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것을 원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그것의 달콤함과 영광과 놀라운 경이로움 때문에 더욱 우리가 그것을 원하도록 해야 합니다.

 

 

Q: 영광스럽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인가요? The glory in what sense?

 

 

Lester: 그것의 영광스러움은 즉 당신이 누구인지를 안다는 영광스러움입니다.

그것은 어마어마한 경험이며 엑스터시이며 지복입니다.

그것을 묘사할 수 있는 단어란 존재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우리는 이런 것을 경험할 수 없는 시대에 살고 있고 그것을 이해할 수가 없죠.

그러니 어떻게 이해할 수 없는 것을 묘사할 수 있는 단어가 있겠어요?

그 느낌을 설명할 길은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현재의 이해를 넘어서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당신이 알고 있는 최상의 단어들을 선택해 보면 그것에 가까울지도 몰라요.

 

파라마한사 요가난다는 “매 순간 솟아나는 늘 새로운 기쁨 ever-new joy welling up every second” 이라고 말했고 아마 그게 가장 현실적인 표현인 것 같아요.

처음에는 매순간 퍼져 나오는 기쁨이고 단지 계속해서 쏟아져 흘러나오고 또 흘러나옵니다.

당신은 도저히 그것을 억누를 수가 없는 것처럼 느껴질겁니다.

 

 

Q: 하지만 거기서 머물러선 안되는거죠.

 

 

Lester: 바로 그겁니다. 매순간 새로이 솟아나는 기쁨에 집착하여 머무는 것은 너무나 쉬운 일이죠.

그것이 바로 요가에서 기쁨으로 짜여진 덮개 ananda sheath 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거둬야만 하는 마지막 덮개입니다.

우리가 지나가야만 하는 마지막 관문이죠.

그 후에 그것은 그 자신의 심오한 평화속으로 녹아들어갑니다.

당신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평화로운 평화속으로 말이죠.

그것은 매순간 새로운 기쁨의 상태보다 훨씬 더 달콤하고 평안한 평화로움입니다.

 

당신이 이 늘 새로워지는 기쁨에서 시작을 했을 때 당신이 그저 이것이 계속되기를 원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또한 당신은 여기서 더 변화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겁니다. 모든 것이 멋지니까요.

하지만 이것은 마지막 단계가 아닙니다.

마지막 단계는 모든 이해를 거쳐 지나온 평화입니다. the peace that passeth all understanding.

이것은 참으로 깊고도 깊은 평화로움입니다.

당신은 세상에서 움직입니다. 몸이 움직이죠. 하지만 당신은 늘 절대적인 평화 안에 머뭅니다.

당신 바로 옆에서 폭탄이 터진다 하더라도 당신은 완벽한 평화 안에 머물 것입니다.

 

 

Q: 어떻게 하면 그런 상태를 유지할 수가 있는거죠?

 

 

Lester: 당신이 거기에 도달하면 당신은 그것을 유지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이 바로 그것이기 때문입니다.

 

 

Q: 음. 그 특별한 상태에서는 우리는 정말 전지 omniscient 하고 세상 모든 것과 하나이기 때문에 생각을 할 필요가 없는 것이군요.

 

 

Lester: 맞습니다. 그게 바로 최고의 상태입니다.

당신이 이 상태로 매우 깊이 들어가긴 하지만 그것을 유지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과거로부터의 습관 즉 아직 없어지지 않은 생각의 습관들이 다시 떠올라서 주도권을 가져가 버리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인 이 무한한 존재를 느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멋진 경험이죠.

그러다가 바로 다음 순간 “아무개가 내가 이렇게 하기를 원하지만 난 그러고 싶지가 않아.”

이런식으로 한 생각이 들어오게 되고 당신은 바로 그 불행한 제한된 생각과 자신을 동일시하게 됩니다.

참자아인 당신이 아주 좁디좁은 에고를 통해서 이 제한된 존재가 되려고 하고 있고 이것은 고통스러운 것이죠.

이런식으로 된겁니다.

 

 

Q: 어떻게 하면 그 에고란 놈을 폭격을 해서 없애 버릴 수가 있을까요?

 

 

Lester: 첫째로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에고를 내려 놓으려는 let go 강렬한 의도입니다.

둘째로 진리의 길을 알고 있는 사람으로부터 그것을 듣고 올바른 방향으로 그 길을 따르는 것입니다.

특히 완전히 깨달은 존재이면 더욱 좋겠죠.

 

 

Q: 그런 사람을 찾기란 쉽지가 않습니다.

 

 

Lester: 아닙니다. 당신이 있는 바로 그곳에서 당신은 그를 볼 수가 있을겁니다.

당신이 어디에 있든 그들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몇몇 사람들의 이름을 들어볼까요?

예수 붓다 요가난다..

미국에 육신을 가진 존재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인도에는 제가 믿기에 몇몇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꼭 육신의 형상을 취할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든 곳에 있으니까요. because they're omnipresent.

 

당신이 할 일이란 당신의 마음의 눈을 열고는 그들을 보는게 전부입니다.

그들은 모든 곳에 편재하므로 그들은 당신이 있는 바로 그곳에 있을 수 밖에 없죠.

또한 그들은 당신을 돕기를 원하기 때문에 만약 당신이 그들에게 자신을 활짝 연다면 반드시 당신에게 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 스승들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하기로 서원을 세웠기 때문이죠.

그러니 당신이 그저 그들의 도움과 가이드를 요구하고 스스로를 활짝 열기만 하면 그들이 바로 거기에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스스로를 육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가끔 우리는 깨달은 존재가 몸을 가지고 있어야만 쉽게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의 육체적인 감각 때문에 우리는 더 많은 도움을 얻게 될겁니다.

육신이 없는 스승보다는 더욱 진짜처럼 보이기 때문이죠.

이러한 이유로 깨달은 존재가 육신 속에 있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그런 존재가 없다 하더라도 우리가 편재한 존재로부터 가이드를 얻을 수가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Q: 힌두의 가르침에 의하면 우리가 살아 있는 구루가 없다면 그것을 해낼 수가 없다고 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단계를 넘어섰다고 하고 선생님께서 그것을 확언해주시는거군요.

 

 

Lester: 그렇습니다. 그렇지만 한가지 스승에게 육신이 있건 없건 그는 살아 있습니다.

 

 

Q: 사람들에게 살아있는 구루가 필요한가요? Do people need a live Guru?

 

 

Lester: 사람들은 구루를 필요로 합니다. 하지만 스승이 반드시 육신의 형상속에 있어야만 하는건 아닙니다.

하지만 그는 생생히 살아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져야만 하죠.

그가 반드시 육신에 있어야할 필요는 없답니다.

우리가 구루를 필요로 하는 이유는 우리가 너무나도 어려운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금 모든 것과 모든 사람들이 “여기는 물질적인 세상이야. 여긴 그런 곳이라고!!” 라고 외쳐대는 물질만능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반복해서 이런 세상속에 태어나 살아왔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제한된 몸뚱아리인 육체라는 이 세상의 무거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완전히 깨달은 존재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공기를 원하는 것보다 더 진리를 원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우리는 매우 빨리 완전한 깨달음을 얻게 될 것입니다.

 

 

Q: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그 말씀들은 선생님의 것인가요?

 

 

Lester: 그 어떤 것도 저의 것이 아닙니다.

제가 말하는 모든 것은 이전에 이미 말해진 것들입니다.

전 그저 그 말들을 나 자신만의 스타일로 이리저리 바꾸어 말하는 것뿐입니다.

새로운 것이란 전혀 없어요.

진리란 항상 그러했고 앞으로도 항상 그러할 것입니다.

 

 

예전에 스승과 제자가 갠지스강에서 몸을 담그고 있을 때 제자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스승이시여. 제가 어떻게 하면 진리를 알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자 스승이 그의 머리채를 잡고는 그를 물 아래로 쳐박아서는 거의 의식이 없어지기 일보직전까지 두었다가 다시 그를 끄집어 내서는 말했습니다.

“지금 네가 공기를 원했던만큼 진리를 원한다면 너는 그것을 알게 될 것이다.”

 

 

밧줄과 뱀에 관한 이야기는 이 물질 세상에 대한 뛰어난 비유입니다.

아마 모두들 알고 계실거라 생각하는데요. 그렇지 않나요?

그 뱀은 단지 환상이었고 실제로는 밧줄이었요.

그러니 아마 누군가가 이 뱀의 세상에서 65년의 세월을 싸우고 투쟁하면서 일생을 보냈을 수도 있죠.

그러다가 아스트랄계에서 쉬다가(역주 : 아마 영계를 말씀하시는듯) 다시 돌아와서는 싸우고 싸우고 또 싸우다가

마침내 그 뱀은 단지 밧줄이었을뿐이고 결코 존재한 적이 없었다는 것을 깨닫게 될겁니다.

이것이 바로 이 물질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마치 뱀처럼 보이겠지만 그것은 환상입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표현은 이 세상은 우리가 밤에 꾸는 꿈과 완전히 똑같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밤에 꿈을 꾸고 있을 때는 그것이 진짜인 것처럼 보입니다. 우리가 거기에 있고 다른 인물들도 있습니다.

그것은 아름답거나 추할 수도 있죠. 그리고 악몽을 꿀 때면 우리는 죽을 것 같습니다. 우리는 정말로 그 안에서 싸우고 있어요.

우리가 꿈속에 있을 때면 언제나 우리에게 진짜와도 같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꿈에서 깨어나면 “ 오.. 이런~ 단지 꿈일뿐이었어. 진짜였던 적이 없었다구..”

그게 바로 정확히 우리가 이 세상의 깨어있는 꿈속에서 깨어나올 때 일어나는 일입니다.

 

 

This Session was recorded in New York City, September 21, 1964.

 

 

from KEYS TO THE ULTIMATE FREEDOM

 

 

 

출처 : 한국트랜서핑센터
글쓴이 : 아인소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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